Yoo Jin-Jai

유진재 개인전
2013-09-02 ~ 2013-09-24

유진재, 들풀에 얽힌 이야기


“한 알의 모래에서 하나의 세계를 보고, 한 포기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블레이크)는 말은 예술가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어떤 측면에서 예술가란 아주 작은 것에서도 진귀한 것을 ‘캐내고’ 사소한 것에서도 심오한 것을 ‘낚아채는’ 사람들이다. 유진재가 꼭 그렇다. 그의 작품에선 이름없는 들풀마저도 레드카펫을 밟는 ‘은막의 여왕’으로 등극한다. 말하자면 들풀이란 평범한 이미지를 통하여 의표를 찌르는 셈이다.
그윽한 향기도 내지 못하고 그 흔한 꽃도 피우지 못하며 누구에게나 한번은 있음직한 호시절도 없는 들풀에 주목하는 이유는 대관절 무엇일까. 아마 그의 눈에는 살아있는 들풀이 다른 무엇보다 귀한 존재로 비춰졌으리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값진 ‘생명’을 무엇과 견줄 수 있으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돕지는 못했지만 생명이 있는 현장에서 그것을 음미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월든>의 저자 소로우(Henry D.Thoreau)가 들려준 말, 즉 “광활한 지평선을 마음껏 즐기는 자 말고는 세상에 행복한 자 없도다”는 표현만큼 유진재의 작품에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의 화면에선 황토 빛 대지위에 들풀이 눈부신 조명속의 주연으로 등장하고, 이파리나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작은 입새와 포자가 조연의 역할로 나선다. 풍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평구도 안에 고즈넉한 들녘의 이미지를 담아냈다.
그의 그림을 살펴보면 대체로 아래 위의 두 층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질박한 바탕이고 다른 하나는 오롯이 올라온 표면이다. 즉 바탕과 이미지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조형의 근간을 이룬다. 바탕은 흡사 박제된 공간처럼 딱딱하게 처리되어 있다. 일체의 움직임은 멈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색조 또한 저채도로 침륜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비활성적이다. 스스로는 어쩔 수가 없고 단지 바깥의 힘에 의해서만 수동적으로 움직일 따름이다. 그러나 채색된 이미지의 공간, 즉 화면의 외피에선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 가느다란 줄기에 걸린 이파리들은 약간의 바람에도 동요하며 몸을 놀린다. 만일 바탕이 박제된 공간이라면, 표면은 움직이고 리듬감을 띤다. 전자가 과거의 시간에 묶여 있다면 후자는 현재의 시간을 활보한다. 여기에 밝은 색조와 또렷한 윤곽은, 그것이 일년초이든 다년초이든, 찬란한 생명감을 고조시키는 구실을 한다.
그의 그림은 묘한 매력을 지닌다. 주관의 강박에 묶인 그림이 아니라 생명을 노래하는 그림이기 때문이리라. 생명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파리가 공간속에 사뿐 내려앉았다. 이파리를 보며 작가가 느꼈을 자연의 경이와 내일에의 소망을 감상자들도 함께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산뜻한 공기를 들여 마실 때처럼 속이 개운해 지는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듯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계속적으로 흡입하고 그 안에 파묻힘으로써 비로소 고결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한편 그의 작품배경은 시골의 흙벽을 연상시킨다. 사람의 손 또는 비바람에 닳아 마모된듯한 표면은 오랜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자연이 생성시킨 것 같은 지극히 편안한 모습을 탄생시킨다. 순리를 쫓아 사는 자연처럼 욕심이 없고 고요한 허정지심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 같다. 어느 곳에 샘이 있어 맑고 깨끗한 물이 마냥 흘러나오는 것 같다.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크게 부풀리는 ‘과잉’이란 찾아볼 수 없다. 자아의 목소리를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자아를 자연의 리듬에 맞게 튜닝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정제된 조형감각을 전달받게 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작가는 천연스런 표정을 얻기 위해 질료의 효과를 최대한 증폭시키고 그 대신에 자아의 간섭은 가급적 피한다. 이런 측면은 작품형성과정에서도 찾아질 수 있는데 작가는 자연적인 질료인 조개가루, 금강사, 돌가루 등을 사용하며 그 질료들이 갖는 오돌도톨 하고 까칠한 속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흙손으로 쓱쓱 밀어 표면의 결을 살려낸다. 그렇게 하여 시골의 담벼락이나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목가구를 볼때와 같이 아련하고 정겨운 감흥을 일으킨다.
그의 작품을 요약한다면 인간과 자연의 친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예술을 자연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영원한 관계를 도모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의 이런 문제의식은 사실 인류가 당면한, 지구촌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 있지만 중세의 수도사 프란시스(St.Fransis)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는 동물과 식물과 교감을 나누었는데 날아다니는 새가 그의 말귀를 알아듣고 산림을 누비는 사자마저 그의 강론을 경청했다고 한다. 세상은 강력한 조화의 틀로 짜여 져 있다. 시냇물이 강과 함께 뒤섞이고 강들은 바다와 함께 어울리며, 하늘과 바람은 영원히 뒤섞인다. 세상에는 어느 것도 홀로 있지 않고 서로가 보듬으며 한 짝이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왜 사람은 자연과 어울리지 못할까. 작은 이파리에서 웃음을 ‘끌어내고’ 행복을 ‘낚아내는’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작가의 아름다운 심성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떤 수법을 사용하여 화면 속에 심어놓았을까.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의 화면은 두 개로 나뉘며 각각의 면에서 비활성과 활성의 대비를 발견할 수 있다. 만일 바탕의 이미지가 촘촘한 물질의 그물에 잡혀 꼼짝 못하고 있다면, 표면의 이미지는 자유롭고 활기차게 존재감을 뽐낸다. 이를 위해 작가는 염색된 금강사를 라바(접착제)에 개어서 나뭇잎모양을 나이프로 공들여 만든다. 펄과 금강사 등을 사용하여 약간의 빤짝임과 광택을 내고 그렇게 하여 명랑한 표면효과를 자아낸다. 자연과의 관계가 소홀할 때 전자에서 보듯이 침울하나 자연과의 교감을 강화할 때는 후자처럼 밝은 표정을 짓게 된다. 바로크 시대에 빛과 어둠의 기아로스쿠로가 있었다면, 유진재에 있어서는 비활성과 활성의 대비, 즉 존재의 아련한 흔적과 살아 숨쉬는 실체로 대체되고 있다. 층위가 다른 두 요소를 한 공간에 병행함으로써 그것의 의미내용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의 영원한 관계’가 쉬임없이 지속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큰 잎사귀 주위의 미세한 잎사귀와 포자들이다. 그것들은 하도 작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요정처럼 들풀 주위를 날아다니며 화면에 진동한다. 작가가 떠도는 이 작은 존재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생명을 퍼트리는 전령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 같은 전령의 행렬이 쉬임없이 이어진다면 더 살맛나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선 살아있는 모든 것에서 ‘병균’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않으며 프란시스가 그랬듯이 병균에서조차 ‘생명’의 거룩함을 볼 것이다. 작가는 작은 입사귀와 포자를 통해 그런 사회에 대한 소망을 담은 것처럼 생각된다.
끝으로 필자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얼마 전에 읽은, 이해인시인의 ‘나무의 연가’란 시가 떠올랐다.
“당신을/보기만 해도/그냥/웃음이 나요/이유 없이 행복해요”(작은 기쁨)
시인이 나무를 보며 시속에서 ‘언어 꽃’을 피우듯이 유진재는 들풀을 보며 화면속에서 ‘그림 꽃’을 피운다. 작가가 들풀을 보며 느꼈을 흐뭇한 미소를 똑같이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혼자 보기 아까워, 그런 잔잔한 행복감을 화면에 실어내지 않았을까.

서성록(한국평론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