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ji young

NALDA 날다
2014-03-06 ~ 2014-03-27

[ 작가노트 ]
이번 전시는 ‘기억’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 관계는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기억을 부여안고 살아간다.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가볍게 말이다. 그렇기에 기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늘 절망과 희망의 경계를 서성이게 된다. ‘관계’란 무엇이고 ‘기억’이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풀어내고자 나와 마주한 또 하나의 나. 거울을 들여다보듯 내 속에 있는 기억의 연결고리를 찾아가기 위해 준비된 이번 전시는 ‘사적인 제례’이자 나를 돌아보는 ‘작은 의식’이라 하겠다.
힘들 때 사람은 누구나 기억을 지우려고 버둥대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기억에 사로잡혀 버리고 만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변화 속에서 기억은 점차 다른 것과 뒤섞이며 제 모습을 잃어간다. 물론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 때도 있을 테지만. 한번 물이 든 천이 원래의 새하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듯 기억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희미해질 뿐이다.

머릿속에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듯 시간의 흔적은 고스란히 영상에 담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 떠나온 공간, 그리움의 기억, 그리고 발을 디디고 삶을 일구는 다른 공간. 그곳에서 또 다른 연을 잇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무수한 반복의 시간, 지워졌던 기억 위에 또 다른 기억이 켜켜이 쌓인다. 공간에 채워진 수많은 깃털은 사람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날고 춤춘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나 작은 진동에 미세하게 반응하는 깃털은, 흡사 사람과 사람의 만남 같다.
심장의 진동이 떨림을 경험하게 하듯 공간에서 날리는 깃털의 움직임은 내가 나를 만나고, 내가 너를 만나는 시간 그림자인지도 모르겠다.



[ 평론 ]
기억을 기억하는 방법

기억은 자기 체험의 보존방법이다. 그리고 자기 정체성 확인의 탁월한 자기통로이기도 하다. 기억에 유독 매료되는 이유는 재구성된 이미지나 과거의 환기 때문이 아니라 기억을 통한 자기의 확인에 있다. 문지영이 이번 작업을 위해 머리채를 잘라버렸다. 하얀 민머리가 드러난다. 머리카락은 타고 날 때 가지고 나온다. 몇 가닥일 수도, 제법 숱이 있는 머리를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백일이나 첫돌쯤 배냇머리를 베어버리고 나면 미용의 수단으로 때로는 성의 구별을 위해 다른 모양을 하지만 대체로 머리를 기른 상태로 성장기를 보내고 학생이 되면 그에 따른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제 모양을 갖춘 것으로 자신의 스타일로 가꾼다. 그래서 머리모양은 한 개별자의 성장 시간과 기억들을 가진다. 그런 머리를 잘라버릴 때는 무명초라 하여 승려가 될 때, 하얗게 민머리를 하여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다. 과거를 잘라버리고 승려라는 이름의 영어(囹圄)로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신체의 어느 부위보다 감성적인 곳이라 의미는 더 감각적으로 된다. 그런데 자신의 시간을 간직하기 위해 시간의 흔적을 담은 것을 잘라 버리는 이 행위는 어디에서부터 설명이 가능할까.
이번 작품전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일관되게 읽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태도의 명시적 표현일 것이다. 머리를 자른 영상 작업과 현해탄의 일렁이는 파도와 후쿠오카항과 부산항이 서로 겹쳐지는 영상이미지, 그리고 그물 짜기라는 무한 반복과 증식이 가능한 설치작업, 그리고 부유하듯 공중에서 미세하게 반응하는 깃털의 설치작업과 이들 작업에서 드러나는 그림자(영상)의 민감함이 그런 것이다.

자르고 자라고, 자란 시간을 잘라버려 무화시키고 자른 자리에 다시 그 시간을 불러내는 새로운 시간이 자란다. 기억이 엉킨 머리카락을 잘라낼 수는 있어도 머리는 다시 자라고 잠시 사라지는 듯한 기억 역시 다시 새록새록 돋아난다. 그것은 시간이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고, 기억이 선형적 시간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간은 관계에 의해 생성되고 기억은 무시간적 존재다. 순환되지만 동일자의 반복이 아니다. 민머리는 곧 무성한 머리채로 자랄 것이고 잘려나간 기억처럼 현재는 기억으로 다시 자리 잡을 것이다, 아니면 잘려나간 자리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여전히 그곳에서 부재인 상태로 있을 것이다. 자기 안에 자기가 반복되는 행위야말로 그가 보는 기억으로서 자기이다.

일렁거리는 파도위에 작은 배가 떠가듯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물결 위로 일렁이며 자신의 길을 가듯 그의 기억은 망망대해 위로 떠다녀도 제 갈 길을 간다. 현해탄의 푸른 물 위로 그는 수없이 왔다갔다/왔다간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듯 현실과 과거 사이로, 혹은 과거를 현실로 불러내고 현실을 과거로 밀어내듯 그렇게 오가는 여정을 보인다. 그러나 그 바다 위로는 어떤 흔적도 남겨지지 않는다. 그의 여정은 그렇게 지속될 것이며 무시무종한 시간의 행로들로 묻히고 일어날 것이다. 시간에 흔적이 남을 수 없으니 그는 다시 영상작업을 통해 이를 담으려하고 지우려한다. 담는 순간 지워지는 것들과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주위를 싸고돈다. 기억은 무시간적이고 기억의 생성 역시 무공간적이다. 어느 곳이든 어느 때든 불쑥불쑥 일어나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간다. 파도는 끝없이 반복한다. 반복이야말로 파도의 속성이다. 자기 안에서 자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만 가능한 한계이자 무한이다. 무한이란 유한으로 가능한 것 아닌가.

기억이었다 현실이었다, 과거였다 현재였다, 현상이었다 개념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위 속에 자신이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종이끈으로 엮은 대형 그물 작업은 수없이 많은 동작으로 계속되지만 단조로운 운동의 지속이다. 단조롭지 않으면 그물은 짜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물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반복이야말로 그물을 만드는 최적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 형식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다. 자신이 자신을 맺고 풀고를 계속하면서 이어나갈 뿐이다.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지만 이미지 없이 무한으로 계속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이 뫼비우스의 띠의 현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이해를 더 심도 있게 요청한다. ‘뫼비우스의 띠’란 평면이지만 입체 같고 입체이지만 평면이다. 이면도 정면도 없다. 그것은 끝나는 데도 시작되는 데도 없는, 무한, 근원의 현상을 보여준다. 파도의 밀려옴과 밀려나감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미 기억이자 시간이며 시간과 기억을 넘어선다. 자기 동일자의 반복이면서 동일성과 반복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저 행위이다.

기억의 낱낱은 모든 것, 미세한 것에도 반응하면서 깃털이 되어 나타난다. 깃털은 한 공간 전체가 자신을 움직이며 공간전체가 하나로 자신과 대응한다. 그래서 깃털은 작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응한다, 그리고 그림자를 만든다. 일정하지 않지만 그림자는 항상 그를 따라 다닌다.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고 일정한 형태이면서도 그림자는 일정하지 않다. 부피를 가지지 않으면서 공간이 필요하고, 사물이 아니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마치 관계 속에서 기억이 움직이듯 공간이 기억에 대응한다. 낱낱이자 전체이고 공간이자 운동이며, 정지이자 무한운동체이며, 그가 속한 공간 자체가 하나의 근원적 운동으로 작동한다.

자신의 탄생과 삶의 곡절이, 자신이 보낸 삶의 여정이 자신이 꾸미고 있는 일상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지만 그것은 마치 머리카락을 자르듯 한 행위 같고, 공간 속의 깃털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니트로 이어지는 끝없는 그물 짜기의 일이다.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이며 자신의 행위로서 연속일 뿐이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일인 것이다. 무엇이 아니라 ‘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여기 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물 짜기라는 반복에서 자기 자신인 채로, 자신 안에서 자신인 채로 자신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반복의 유한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업이 그것이다.
그의 이번 작품을 이루는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이런 무시간성과 무공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하는 것, 행위만 있을 뿐이다. 지금의 그 행위야말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아내는 무시간성으로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문지영의 작업은 일본인의 아내이면서 한국 국적을 가진 경계인으로서 개인적 체험이 중요 계기이다. 그 체험은 머리 자르기, 파도의 일렁임, 그물 짜기, 깃털처럼 공중에 부유하는 그림자로 반복되는 행위로 기억하기이다. 그 기억은 기억되기보다 기억에서 사라지려 하는 것이다. 기억으로 기억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기억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사는 것, 현재의 행위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곧 삶 전체를 기억의 연속이자 기억의 단절이며 기억의 지속성임을 보이는 일이다. 지속이야말로 자신 안에 가능한 힘이다. 자신이야말로 과거를 현재로 하는 시간, 현재 속에 펼쳐지는 과거인 것이다. 그녀의 시간과 기억이란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반복이며 유한으로 유한을 넘어서기이다.

반복행위는 그 자체가 시작인 강렬한 능력이라는 점에서 오로지 현재에만 사유되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은 기억으로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로서 행위 되는 기억을 찾고 기억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업에서 무엇보다 비디오나 영상작업의 용이성이 가져온 시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다. 요즘 미술판에서 예사로 보듯이 “예술작품은 더 이상 과거행동의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사전의 전조나 가상의 행동에 대한 제안으로서 나타난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예술작품은 전시의 각 경우가 새로이 현재화되거나 재생되도록 책임을 져야 하는 물질적인 그 지속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문지영이 그를 기억하는 방법이 오브제가 아니라 영상(그림자)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강 선 학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