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Dae-Hong

안녕 대홍 - Helllo DaeHong
2013-05-16 ~ 2013-06-06

‘안녕 대홍'

작년 12월 끝자락, 꽤 오랜 기간 일해왔던 ‘오픈스페이스 배’ 디렉터 일을 그만두고 기획자가 아닌 작가로서 몇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다. 그중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이 5월에 예정된 '갤러리 미고'에서 개인전이었는데, 이번 개인전은 예전처럼 여러 장르를 혼합한 설치 형태가 아닌 회화만을 매체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나의 후원인인 B 출판사 대표인 K 선생이 오래전부터 '대홍 씨 회화 전시 한번 해 보세요' 라는 제안을 자주 했었고 또한 주변 지인들로부터도 그러한 의견을 자주 들은 탓에 조만간 회화를 매체로 전시해보리라 마음먹었던 차였고, 또 다른 이유는 작품을 팔아서 창작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려는 단순한 목적이 결합하여 시작되었다.
약 10년 넘게 작업실이 없었던 나로서는 회화를 매체로 하는 전시의 가장 큰 걸림돌이 작업할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이전의 설치 작업들은 여러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전시장 내외에서 준비가 가능했었다. 그러나 그림은 그런 방식으로는 불가능 하기에 그 시작부터 막혀있던 상황이었다. 사실, 자투리 공간을 가지고 있는 그리 자주 만나지 않는 친구들에게 부탁하거나, 좀 먼 도시에 있는 친한 동료에게 공간을 같이 쓰자고 할 수도 있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아 단념하였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짧은 기간 동안 작품에 집중한다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말이다.

그러던 중 'K' 선생과 주말 점심 약속을 한 날이 있었는데, 공교롭게 며칠 후 경기도에서 목공방을 운영하는 나의 친한 친구 M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M은 대학 때 조소 전공 선배로 오랫동안 록밴드 보컬,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어느 날 목수로 그 삶을 바꾸고 경기도에서 전시장이 딸린 공방을 운영하는 오래된 지기이다. "홍, 아내가 요번 주말에 대만 간다. 올라와서 한잔하자!" 아주 단순한 통화였다. K 선생과의 선약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주 볼 수 없는 M을 만나야 한다는 빌미로 훌쩍 올라가는 것에 더 마음이 뺏겨 버렸다. 이전에는 어디를 '훌쩍' 가본다는 게 참 어려웠기에 그에 따른 보상심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K 선생께 약속을 취소하게 된 사정을 말씀드리고, 몹시 추운 어느 날, 나의 미니카를 타고 태어나 가장 먼 거리를 운전하여 눈이 쌓인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다. 오랜만의 만남에 늦은 밤까지 원래 목표와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여러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회화 개인전을 준비 중인데 작업실 문제 때문에 진행이 지지부진하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M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끝낸 M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 시절 통기타 노래모임 선배 중 모발이식 전문병원을 운영하는 H라는 형이 있는데, 너 얘기를 했더니 마침 병원에 남는 공간이 있다며 흔쾌히 수락하더라고 했다. 게다가 예전에 개와 사람이 빗속에서 놀고 있는 그림을 전시장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작가가 누군지 찾아봤지만 찾지 못하였다며 그 작가가 바로 너였다고.

사실 이런 얘기를 듣고 모르고 있었던 인연에 대해 많이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낯선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 보다, 뭔가 새로운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훨씬 커졌다. 부산에 돌아온 후 그를 만나기로 하였고 약속 장소인 '한상보 모발이식 센터'에 들렀다. 초면이었던 우리는 서로의 살아온 삶을 최대한 압축하여 소개하였고, 첫 만남에서 나올법한 이런저런 자그마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말하길, 유화 기름 냄새를 맡아본 경험이 없어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없지만, M으로부터 유화 냄새가 병원 업무에 방해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혹여 그러한 가능성을 그러한 상황을 대비해 '플랜 B', 즉 또 다른 공간을 준비해 놓았다고 했다. 그 공간은 빈 사무실이며 크기도 큰 편이라 한다. 물론 넓고, 아무도 없는 그 공간이 자유롭게 작업하기에는 더 적합하겠지만, 나는 이미 '모발이식 전문병원 한쪽에서 개인전을 준비'한다는 그러한 비일상적인 '상황'에 이미 매료되어 있었던 터였다. 세상에서 몇 명의 작가가 병원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겠는가? 적어도 내게는 이런 상황이 여러모로 나의 삶과 그 모양새가 많이 닮았다고, 그리고 H 원장이 아주 독특한 사람이라는 M의 귀띔 때문에 생긴 호기심이 작업 여건의 편의성보다 훨씬 컸기에 말이다.

짧은 이야기를 끝낸 후 설날 이후부터 작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하던 중 H 원장이 '참, 가기 전에 보톡스 한 대 맞읍시다.' 라며 진료대 위에 나를 눕혔다. 이전까지 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있지 않던 단어, '보톡스'가 물질이 되어서 내 눈가 양옆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주름을 늦추는 기능보다 나에게는 아주 즐거운 유머였고, ‘보톡스 주사'와 함께 5월 회화 개인전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보톡스 시술이 피부 주름을 늦추는 효과 외에 창작에도 효과가 있었다. 그리 넉넉한 준비 기간이 아니었음에도, 약간은 무리해서 잡았던 계획 대부분이 거의 갈무리될 정도로 훨씬 수월한 진행을 했으니 말이다. 혹시 슬럼프나 딜레마에 빠진 작가가 있다면 '보톡스 시술'을 받으라 적극 권장하고 싶다. 이미 ‘창작에 대한 보톡스 내성'을 가진 작가라 하더라도, 최소한 주름은 6개월간 덜 질 테니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지 않은가.
예전의 잡다한 스케치와 생각에 색을 입히고 싶었기에 작업의 시작은 여행과 같았다. 덕분에 기억이 시작되는 아주 오래된 시절부터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날까지 매일 같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H 원장과 나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의 일이 다르므로 병원에서는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식사 후 산책을 하며 예술과 사회에 관해 이야기하고 남은 날들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날 H 원장은 부탁이 하나 있다며 새로 이사 갈 병원의 로비에 들어갈 입체 작업을 부탁했다. 조각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나는 정중히 거절했고, 그림으로 대체하자고 말했다. 그는 나의 의견에서 다른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대신 병원이라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는 조건은 붙였다. 나는 몇 달간 그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봄바람이 뇌를 간질이던 어느 날 ‘가죽이 벗겨진 채 들판을 달리는 개'를 완성했다. 그 작업은 꽤 오래전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예술이 아닌 다른 일에 몰두하던 시절로 말이다. 마치 가죽이 벗겨졌던 것처럼 느껴진 그때 당시로.

모두가 힘들던 IMF 시절, 나는 대학을 졸업 후 부모님의 소망대로 운 좋게도 모 대기업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러했듯 코흘리개 시절부터 20대 후반까지 ‘혹독한 교육’을 극복하였기에, 약간의 신입사원 연수만으로도 바로 현장에 적응할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자식으로부터 노후를 보장받았다는 안도감과 평생 시달렸던 가난과 차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행복해하셨다. 가끔 부모님의 친구나 친척 어르신으로부터 취직을 축하한다는 말씀을 통해 부모님의 무표정 뒤에 있는 행복을 엿볼 수 있었다. 회사도 우리를 좋아했다. 조금의 최적화 교육 이후 바로 현장에서 일할 능력이 있었고, 수직적 지휘 체계에 거부감이 없었으며 또한 회사에 대한 높은 자부심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퇴근 후 혹은 휴가 중에도 다니는 직장의 계열회사 마트에서 장을 보고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군것질거리 까지 사 먹으니, 회사의 입장에서는 이상적 구조였으니까.

한 날 ‘개구리 프로젝트’를 보고하던 자리에서 나는 상사로부터 모진 질책을 받았다. 개구리를 태워 그 꿈틀거림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것에 관한 프로젝트였는데, 나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이용해 놀이처럼 접근하는 전략을 세웠었다. 그러나 상사는 나의 아이디어는 사회적 논란의 요소와 전략의 순진함을 지적했다. 그는 몇 마리를 불태워 꿈틀거리게 하여 기업이 저지르는 동물 학대로 보이기 보다, 문화를 만드는 것이 더 현명한 전략이라고 했다. 가령 축구 경기나 야구가 있는 날 ‘맥주와 훈제 개구리’라는 문화를 만들어 행복감을 통해 의심의 요소를 감추고, 또 다른 안전장치로 애완동물 산업 확장을 통해 소비자로의 판단력을 교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몇 마리의 학대는 비도덕적이지만 집단적 학대는 문화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어린 아이손에서 불타 꿈틀거리는 개구리' 프로젝트는 파기되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전기장판 위에서 두 겹의 이불을 덮고 평소와 약간은 다른 모습으로 꿈틀거리며 잠을 자게 되었다.

내 몸속에 흐르는 예술가 기질 때문인지, 더는 직장에서 근무하기 어려울 만큼의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매일 하루가 군대 생활로 돌아간 듯 하였고,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나로서는 타인에게 근심을 끼칠 만큼 어두운 표정을 자주 지었다. 더는 지속할 수 없었기에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한 채 회사를 그만두고, 홀로 홍콩에서 몇 달을 보내게 되었다. 대부분 사람이 홍콩을 휘황찬란한 도시로 알고 있지만 내가 있던 곳은 그런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홍콩 중심에서 꽤 많이 떨어진 외딴 어촌 마을이었으며,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나는 거기에서 낮에는 산책하고 해지면 맥주 마시는, 그리 특별치 않은 일상을 보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하루에 정말 몇 마디 하지 않고 시간을 지낼 수밖에 없었으니 산책과 맥주를 마시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할 것이 없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 옆 바위길 해안을 거닐 때였다. 누런 강아지 한 마리가 저 멀리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 특별나지 않은 그 흔한 누렁이였지만, 난 첫눈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뭔가 하나를 건질 것 같은 기분에 가방에 있던 비디오카메라를 꺼내어 그 강아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오던 강아지는 내 발 앞에 멈춰 서서는 애정을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순간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줘야 하는지 아니면 촬영을 계속해야 하는지 갈등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 영상을 보면 그러한 갈등 때문에 화면에 손 떨림이 간헐적으로 나타나 있다.

나는 촬영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고, 강아지는 반응 없는 나의 모습에 실망하였는지 한참을 머물다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나는 줌을 당겨 계속 촬영했고, 그 강아지는 자꾸만 멈춰 서서 나를 뒤돌아 봤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했고, 나는 '반응을 보일까 아니면 촬영을 이어갈까?' 몇 번을 고민했다. 결국, 그 강아지는 바위길 모퉁이에서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린 후 사라졌다. 아마 그때가 홍콩에서 지내면서 누군가와 가장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이라 기억된다.
홍콩에서 돌아온 뒤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혼자 지내었다. 너무 많은 사회관계에 지쳐 있었고, 스스로와 이야기할 시간이 아직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 직장의 상사는 내가 연락을 안 하는 것에 대해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나만의 시간을 가졌으니 이제 다시 내가 있던 사회로 돌아갈 필요성도 느껴 그를 만나기 위해 둘이 즐겨 찾던 숲 속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은 자가용을 몰고 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버스를 이용하면 꽤 오랜 시간을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다. 나는 승용차 대신 걸어가며 풀 향기를 맡기로 했고, 가는 동안 들을 곳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은 '레몬 두더지'로 불리는 '고구마 두더지'의 집이었다. 내게는 친한 두더지 친구가 하나 있는데, 찻집을 가기 위해 자주 지나다니던 고구마밭이 그의 영역이다. 사는 곳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몸매도 그가 좋아하는 고구마랑 비슷했다. 그가 말하기를, 다른 곳에 사는 친구로부터 '레몬'이라는 과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주 매끈한 몸매와 향기,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지니고 있다며 말이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친구의 허풍을 믿지 않았지만 속으로 ‘레몬'이라는 단어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머릿속에 박혀 버린 ‘레몬’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해졌고, 어디서 구할 수 있으며 그 생김새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은 어떤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궁금증 때문에 일상이 조금씩 뒤틀려 갔던 얘기를 해줬다.

부슬비가 오던 어느 날 새벽, 레몬을 보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을 불쌍히 여긴 고구마밭이 ‘내일 아침이면 네가 눈을 뜨게 될 꺼야’라며 잔잔한 목소리로 그를 보듬어 주었다고 한다. ‘아침이면 그토록 원하던 레몬을 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만날 수 있으리라!’ 라는 환호성을 뒤로한 체 한시라도 빨리 아침을 만나기 위해 잠자리로 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했던 아침은 그의 상상과 너무 달랐다. 한 번도 눈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그였기에 색과 형태는 그저 고통스러운 시각적 신호였으며, 게다가 높낮이의 구조는 이때까지 사물을 이해하던 체계와 너무도 달랐다. 피부와 소리, 냄새로 익힌 세상을 눈으로 이해해 보려 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공포뿐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땅속에 들어가도 눈을 뜰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도 무서웠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눈알을 뽑아낼 수밖 없었고, 선택이란 결코 다양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알게되었다고 했다. 그제야 그가 사랑하던 이끼가 가득한 비밀의 장소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으며 편히 쉰다는 기쁨을 다시 찾게 되었다고. 나는 그가 고구마 모양이 아닌 왜 황금빛 털과 레몬 모양의 둥그런 몸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뒤, 나는 동생을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동네로 향했다. 그 동네는 마치 ‘아기공룡 둘리’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벽돌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런 곳이다. 사실, 실제 둘리가 거주하던 고길동의 집 주소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니 비슷할 수밖에. 이곳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보이지 않는 섬', 이다. 내 동생의 집은 붉은 벽돌의 자그마한 주택이 택배 트럭 안의 택배 상자같이 밀집된 동내 어느 집 옥탑이다.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마치 섬에 있는 내 모습을 보게끔 만든다. 땅이 아닌 공중에 떠다니듯 거닐며 우아함과 신비, 그리고 동시에 우리와 어울릴 수 없는 고독이 같이 있는 섬. 그래서 그 섬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을지도 모른다. 잠시 동생과 보이지 않는 섬에서 같이 지낸 후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을 만나기 위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내 딸아이의 얼굴에는 버짐이 피어올랐었다. 지금은 그리 흔한 병이 아니라 그런지 여자친구는 호들갑이었다. 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까무잡잡하던 피부에 허연 버짐 안개꽃처럼 폈던 어릴 적 친구가 문득 떠올랐다. 내가 어른이 되면 제비나 까마귀가 되고 싶었다는 기억과 함께. 그날도 지저귀는 새들을 바라보며 내 어린 날을 딸에게 투영시키고 있었는데, 옆에서 ‘아빠' 하며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허연 버짐이 핀 얼굴에 호기심 가득 찬 눈망울로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는 그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목이 잘린 뱀이 들고서.